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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최경환 프란치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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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최경환 프란치스코 (0920)

1805.10.15~1839.9.12 

순교 한국 회장

 

일명 영환(永煥), 영눌(永訥), 치운이라 한다.

우리나라의 두번째 방인사제인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1821-1861)의 아버지이다.

 

충청도 홍주(洪州) 땅 누곡(樓谷, 지금의 충남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의 다락골)에서 부친 최인주(崔仁住)와 모친 경주이씨

(慶州李氏)3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집안이 원래 교회창설 시대 때부터 천주교를 믿어 온 집안이라 어려서부터 열심히 신앙 생활을 했고, 성장해서 

'내포(內浦)지방의 사도' 이존창(李尊昌)의 후손인 이성례(李聖禮, 마리아)와 혼인한 뒤, 가족들과 상의하여 

교우들이 많이 살고 있는 서울의 벙거지골(笠洞) 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박해와 외교인들의 탄압 때문에 가산을 버리고 서울을 떠나 강원도 금성(金星), 경기도 부평(富平)을 거쳐 

과천(果川)의 수리산(현재의 안양시 만안구 안양9동 수리산)에 정착하였다

여기에서 회장으로 신자들과 교우촌을 돌보며 오직 신앙생활에만 전념하였다. 그리고 1836년에 큰 아들 최양업

(토마스)를 모방(Maubant, ) 신부에게 신학생으로 맡겨 마카오로 유학보냈다.

 

이곳에서 그는 자기의 본분을 지키며 종교서적을 자주 읽고 가난 중에도 애긍시사를 하니 사람들은 그를 존경하여 

그의 권고를 즐겨 듣고 천주교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려고 멀리서도 찾아오곤 하였다. 최 토마스 신부는 훗날 다음과 

같이 회고 하였다. “저의 부친은 자주 묵상하고 신심서적을 대하셨으며, 언제나 종교와 신심외의 것은 말하지 아니

하셨으며, 아버지의 말씀은 힘 있고 설복시키는 능력이 있어 모든 이에게 천주의 사랑을 심어 주셨다.”

 

기해박해가 엄습하고 또 서울과 인근 지방이 기아에 시달리고 있을 때, 회장으로 임명된 그는 많은 의연금을 모아 

옥에 갇힌 사람들을 돌보아 주었고, 순교자의 시체를 매장하였다. 그리고 집안사람들에게 순교토록 준비시킬 때가 

된 것을 알고 성패와 성물을 감추었으나 서적은 감추지 아니하였다. 이것을 보고 조카 최 요한이 놀라서 다른 교우

들은 혐의를 받을만한 것을 모두 감추는데 이 책을 그렇게 내어 두십니까?” 하고 물었더니 성물은 불경한 무리들이

더럽히지 못하게 감추는 것이지만, 서적이야 어디 강복한 물건이냐? 군사가 전쟁 때에 병서를 참고하지 않고 언제

하겠느냐?” 하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1839731일 밤 서울에서 내려온 포졸들이 수리산에 이르러 고함을 치며 최 프란치스코의 집으로 달려들었다

그는 조금도 놀라지 않고 마치 가장 친한 친구를 대하듯 포졸들을 친절한 태도로 맞이하였고, 그의 이러한 태도에 

포졸들은 안심하고 누워 잠을 잤다. 해뜰 무렵에 포졸들을 깨워 음식을 대접하고는 프란치스코와 남자들과 큰 아이

들이 앞장서고, 그 뒤로는 부인들과 젖먹이들이 따라가고, 맨 뒤에는 포졸들이 따라왔다. 때는 7월이라 찌는 듯한 

더위로 빨리 걷지를 못하였고 어린 아이들은 피곤하여 울부짖었다. 행인들은 악담과 저주를 퍼붓는 사람도 있고 

불쌍하게 보는 사람도 있었다. 이에 그는 형제들아 용기를 분발하라. 너희 앞을 서서 갈바리아로 올라가시는 오 

주 예수를 보라!”고 하며 격려하였다. 일행은 날이 저물어서야 옥에 당도하여 밤을 지냈다.

 

포장은 프란치스코를 두 차례나 주리를 틀게 하고, 뾰족한 몽둥이로 살을 찌르게 하여 배교한다고 할 때까지 고문을 

하게 하였다. 프란치스코의 아들 하나가 나라 밖으로 나갔다는 것을 안 포장은 더욱 분이 치밀어서 무지하게 매질을 

하여 그의 팔과 다리의 뼈가 어그러졌다. 그는 태형 340도와 곤장 110도를 맞았다. 다른 많은 교우들은 석방되었으나

끝까지 신앙을 증거한 이는 프란치스코와 그의 아내와 일가 부인 3명뿐이었다. 그 후 프란치스코는 포장대리 앞에 

끌려 나가 치도곤 50대를 맞으니 그것이 최후의 출두요 형벌이요 신앙고백이었다. 옥으로 돌아온 그는 예수께 내 

목숨을 바치고 도끼날에 목을 잘리는 것이 소원이었으나 옥중에서 죽는 것을 천주께서 원하시니 천주의 성의가 

이루어지이다라고 말한 후 몇 시간 뒤에 숨을 거두었다. 때는 1839912일이요, 그의 나이는 35세였다.

 

그는 192575일 교황 비오 11(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5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인 崔榮訥(京煥 프란치스코) 간추린  약력
 

출생지

충남 청양군 농암리 다락골

출생

18051015

수리산입주

18377

전교회장

1839년 춘월

체포

1839731

옥사순교

1839912(35)

시복(로마)

192575

유해이전

1929618

시성(서울)

198456

성인 기념비 건립

1984415(성지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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